손흥민 부활 (위치변화, 전술분석, 아시안컵)

솔직히 저는 월드컵 직전까지 손흥민의 부진을 단순히 나이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리그 13경기 무득점,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 무득점. 숫자만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4경기 4골, 올스타전 MVP까지 챙기는 걸 보고 뒤늦게 제가 잘못 짚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선수가 아니라 선수를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축구 경기장


시즌 초반 부진, 컨디션 문제였을까

일반적으로 손흥민의 침묵을 두고 "나이 들면서 스피드가 죽었다"거나 "대표팀 일정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 쪽에 무게를 뒀습니다. 실제로 프리시즌 부상 여파가 있었고, 2월 개막 이후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부분적인 원인일 뿐,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시즌 초반 산토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LAFC의 색깔이 바뀌었습니다. 전임 체르돌로 감독 시절은 수비적이고 직선적인 팀이었습니다. 볼을 빠르게 전방으로 연결하고,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었죠. 손흥민은 그 안에서 공간을 파고드는 침투형 스트라이커(Penetration Striker)로 기능했습니다. 침투형 스트라이커란 수비 뒷공간을 빠른 스피드로 파고들어 득점 찬스를 직접 만들어내는 공격수 유형을 말합니다. 그런데 산토스 체제에서는 점유율을 높이고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전술 기조가 바뀌면서, 손흥민에게 볼을 받아주거나 찬스를 연결하는 플레이메이커(Playmaker) 역할이 늘었습니다. 플레이메이커란 팀의 공격을 조율하고 패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를 뜻합니다. 슈팅 횟수 자체가 급감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손흥민이 하프라인 근처까지 내려와서 경기를 풀어주는 장면이 늘어날수록, 저는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그건 손흥민이 가장 잘하는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득점 본능이 살아있는 선수를 도움 전담으로 쓰는 건 칼을 가위로 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전술 변화가 만든 공간, 흥부 듀오의 부활

월드컵 이후 손흥민이 달라진 건 딱 한 가지입니다. 더 앞에 섰습니다. 히트맵(Heatmap)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히트맵이란 선수가 경기 중 어느 위치에서 얼마나 자주 활동했는지를 색깔로 시각화한 분석 자료를 말합니다. 이전과 비교해서 활동 반경이 훨씬 상대 진영 깊숙이 올라가 있습니다. 볼을 잡고 전진하는 거리도 두 배 가까이 늘었고, 그만큼 돌파와 슈팅 기회가 잦아졌습니다.

산토스 감독이 손흥민에게 내린 지침은 단순했습니다. 내려오지 말고 기다려라. 볼 탈취 후 빠른 전방 전개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손흥민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수비를 맡고 볼을 따내면 손흥민이 최전방에서 마무리하는 구조입니다. 이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메시를 활용했던 방식과 유사합니다. 수비 기여를 줄이고 득점에만 집중시키는 역할 분리죠.

여기서 드니 부앙가와의 시너지가 결정적입니다. 상대 수비는 손흥민만 집중 마크할 수 없습니다. 부앙가가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오거나 측면을 파고들면, 수비 시선이 분산되고 손흥민 앞에 슈팅 공간이 열립니다. 이 두 선수의 조합을 '흥부 듀오'라고 부르는 게 이제는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실제 전술 개념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직접 밴쿠버 화이트캡스전 골 장면을 돌려봤는데, 샤펠버그의 볼 탈취 직후 부앙가가 수비를 끌어당기는 동선이 정확히 손흥민의 오른발 슈팅 공간을 만들어줬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설계된 움직임이었습니다.

최근 주요 득점 장면을 정리하면 패턴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1. LA 갤럭시전: 샤펠버그의 침투로 수비 시선을 끌어낸 뒤, 손흥민이 왼발 각도가 막히자 즉시 오른발로 전환해 마무리
  2. 솔트레이크전: 델돈의 대각선 침투 + 부앙가의 측면 침투로 수비가 두 방향으로 분산, 손흥민이 여유 있게 슈팅 공간 확보
  3. 밴쿠버전 선제골: 샤펠버그 볼 탈취 직후 손흥민과 부앙가가 최전방 대기, 부앙가가 수비를 끌어당겨 손흥민 오른발 슈팅 공간 마련

세 골 모두 골대 하단 구석을 정확히 찌르는 마무리였습니다. 손흥민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코스입니다. 좋은 공간에 서게 해주면 이 선수는 알아서 넣습니다.

결정력과 심리, 전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술적 요인이 가장 컸다는 건 분명하지만,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고 싶습니다. 결정력(Finishing Ability)의 회복입니다. 결정력이란 득점 찬스를 실제 골로 전환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건 신체 컨디션만큼이나 심리적 안정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월드컵 직전까지 무득점이 이어지면서 손흥민에게 가해진 압박감은 상당했을 겁니다. 국내 팬들의 기대, 대표팀 에이스라는 무게. 그 압박이 슈팅 타이밍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그 부담감이 어느 정도 해소됐을 겁니다. 클럽 경기로 돌아와 LA 더비에서 첫 골을 넣으면서 자신감이 올라왔고, 그 이후 득점 행진이 이어진 건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눈여겨본 부분은 슈팅 타이밍입니다. 최근 득점 장면을 보면 한 박자 빠르거나, 오히려 수비수가 예상하는 타이밍보다 살짝 늦추는 방식으로 골키퍼와 수비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습니다. 터닝슛(Turning Shot), 즉 몸을 돌리면서 즉시 발사하는 슈팅과 박스 바깥에서의 왼발 강슛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감각은 컨디션이 올라오고 심리적 여유가 생기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플레이입니다. 북중미 월드컵 본선 실전 경기들이 이 감각을 되살리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고 봅니다.

MLS의 수비 수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유럽 리그 대비 수비 퀄리티가 낮기 때문에, 짧은 순간의 공간만 생겨도 득점으로 연결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이 점에서 손흥민의 최근 득점 수치를 유럽 리그와 단순 비교하는 건 맥락을 놓치는 일입니다. 다만 MLS에서 90분당 득점 기여가 메시 다음 수준이라는 건, 그 환경 안에서도 손흥민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시안컵, 손흥민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가

LAFC의 사례를 보고 나면 대표팀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손흥민은 어디서나 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틀렸습니다. 손흥민은 특정 조건이 갖춰졌을 때 폭발합니다. 그 조건이 없으면 멕시코전처럼 위협적인 찬스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경기가 반복됩니다.

월드컵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손흥민이 침투한 이후 동료들의 연계 움직임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수비를 분산시켜줄 움직임이 없으면 상대 수비는 손흥민 한 명에게만 집중하면 됩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시스템으로 해결한 게 LAFC이고, 대표팀은 아직 그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체코전에서 황인범이 적극적으로 전진해 수비를 흔들었을 때 손흥민이 득점한 사례가 그 해답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다음 감독이 누가 되든 손흥민 활용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나이를 고려해 수비 가담을 줄이고, 동료들의 움직임으로 수비를 분산시켜 손흥민에게 득점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이 구조가 작동할 때 손흥민의 양발 결정력은 아시아에서 막을 선수가 없습니다. 아시안컵이 손흥민의 라스트 댄스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지금, 감독의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축구는 결국 감독 놀음이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 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손흥민이 시즌 초반 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가 뭔가요?

A. 개인 컨디션 문제도 일부 있었지만, 핵심은 전술적 역할 변화였습니다. 산토스 감독 부임 이후 점유율 중심 전술로 바뀌면서 손흥민이 하프라인까지 내려와 경기를 푸는 역할을 맡게 됐고, 슈팅 횟수 자체가 급감했습니다. 침투형 스트라이커를 플레이메이커로 쓰는 구조적 미스가 부진의 본질이었습니다.

Q. '흥부 듀오'가 효과적인 이유가 뭔가요?

A. 드니 부앙가가 대각선 침투나 측면 돌파로 수비 시선을 분산시키기 때문입니다. 상대 수비가 두 방향을 동시에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손흥민 앞에 자연스럽게 슈팅 공간이 열립니다. 두 선수가 서로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구조 자체가 수비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Q. 대표팀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나요?

A. 원리는 동일합니다. 손흥민이 침투할 때 동료들이 연계 움직임으로 수비를 분산시켜줘야 공간이 생깁니다. 체코전 황인범 사례처럼 중원 선수가 적극적으로 전진해 수비를 흔들어주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감독이 이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해주느냐가 아시안컵 성패를 가를 변수가 될 것입니다.

Q. 손흥민의 MLS 성적이 유럽 리그와 비교할 수 있는 수치인가요?

A. 단순 비교는 맥락을 놓치는 일입니다. MLS 수비 수준이 유럽 빅리그보다 낮은 건 사실이고, 그만큼 득점 환경이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같은 환경에서 90분당 득점 기여가 메시 다음 수준이라는 건, 리그 안에서도 손흥민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Q. 월드컵 이후 손흥민이 급격히 살아난 데 심리적 요인도 있나요?

A. 있습니다. 오랜 무득점 행진 동안 쌓인 압박감이 슈팅 타이밍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월드컵 일정을 마치고 클럽으로 돌아와 LA 더비 첫 골을 넣으면서 자신감이 회복됐고, 이후 특유의 타이밍을 빼앗는 결정력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전술과 심리가 동시에 맞아떨어진 결과입니다.

산토스 감독이 손흥민의 활용 방식을 바꾼 것만으로 팀 전체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좋은 선수의 장점을 어떤 구조 안에서 꺼내느냐가 전부입니다. 아시안컵을 앞둔 대표팀에 주어진 과제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손흥민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고, 그 공간을 만들어줄 동료의 움직임을 설계하는 것. 거기서 출발해야 손흥민의 라스트 댄스가 제대로 된 마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youtu.be/YLpkzW1smq0?si=gFK6Jso5Xte88e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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